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리처드 파인만 (문단 편집) == 출생 배경과 성격 == [[뉴욕]] 퀸스의 파 라커웨이(Far Rockaway)에서 [[유대인]]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2살 때부터 [[책]] 읽는 것을 좋아했고, 그런 파인만의 아버지는 어렸을 때부터 파인만을 [[과학자]]로 만들고 싶어해 적극적으로 가르치는 한편 자식을 유대교 주일학교에 보내 히브리어까지 배우게 했다. 파인만은 이렇게 주위의 열성적인 의지하에 유대교 학교에 다녔으나 13살 이후로 종교에 대해 거부하고 유대인들이 선택받은 자라는 선민의식을 버렸다.[[http://www.telegraph.co.uk/culture/books/3643596/Physics-bongos-and-the-art-of-the-nude.html|#]] 어렸을 적 이후 파인만은 줄곧 [[무신론자]]였으며 자신에게 유대인이라는 꼬리표를 달거나 남을 유대인 등의 인종으로 분류하는 것을 싫어했다. 또한 유대인들이 자연현상보다 토라해석에 더 열을 내는 모습을 보고 실망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럼에도 기독교의 정신적 유산까지는 거부하지 않은 그였기에 캘텍 런치 포럼에서 기독교와 과학의 싸움에 대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내가 보기에 서구 문명은 두 가지 위대한 유산을 고수하고 있다. 하나는 모험을 추구하는 과학정신-언젠가는 밝혀질 미지의 세계 또는 여전히 불확실한 미스테리로 남을 세계를 향한 모험-말하자면 지적인 겸손함이다. 다른 하나의 위대한 유산은 기독교 윤리-사랑과 형제애, 개인의 가치에 관한 기초-말하자면 정신적인(spiritual) 겸손함이다. > >이 두 가지 유산은 논리적으로, 완전히 일관된다. 하지만 논리만이 전부는 아니다. 어떤 발상에 따르려면 마음이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종교로 돌아가자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근대의 교회가 신의 존재를 회의하고 부정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위로를 주는가? 오늘날의 교회가 그런 사람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제공해주고 있는가? 이 두가지 유산들은 지금까지 서로를 상처내오는데만 주력하지 않았는가? 이런 것들은 정말 피할 수 없는 일인가? 이 두 가지 유산, 서구 문명의 두 기둥이 서로를 두려워하지 않고 완전한 활기를 가지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이것이야말로 오늘날의 가장 중요한 문제가 아닌가?" >---- >[[http://271828.egloos.com/m/446119|번역 출처]] / [[http://calteches.library.caltech.edu/49/2/Religion.htm|원문]] 어린 시절[* 1918년 출생했으므로 1920 ~ 1930년대.] 그는 [[라디오]] 수리에 많은 관심을 뒀으며 동네의 라디오 수리를 도맡아 하기도 했다. 동네 사람들은 그를 '''생각만으로 라디오를 고치는 소년'''이라고 불렀다. 기계를 다루는 데에 재능이 있어 초등학교 때 그는 [[나홀로 집에|부모님이 집을 나간 사이 집에 강도 경보 시스템을 만들었다.]] 그는 15세 때 (한국 나이 16 ~ 17세) 삼각함수, 대수, 무한급수, 해석 기하학, 미분과 적분[* 한국의 수학 교과 과정으론 대수는 중학교 수학 ~ 고교 수 1, 2. 미적분 및 급수는 미적 1, 2. 해석 기하학은 [[기하와 벡터]] 정도 되므로, 15세 때까지 고교 수학을 모두 끝 마쳤다 보면 된다. 일종의 [[선행학습]]이라고 보면 될 듯.]을 익힌 상태였는데, 대학에 입학하기 전에도 '''스스로 고안해 낸 수학 기호들을 사용'''하여 문제를 풀었다.[* 하지만 곧 자신의 기호를 사용해 설명하면 남들이 이해하지 못한단 걸 깨닫고, 어쩔 수 없이 일반적인 수학 기호를 사용했다.] 그의 직설적인 화법은 때때로 사람들을 당황하게 하였는데, [[고양이]]의 [[신경계]]에 대한 발표를 준비하기 위해 도서관에 가서 사서에게 "고양이 지도(a map of the cat)에 관한 책이 있으면 빌려주세요."라고 물었다가 큰 웃음을 들었다고 한다. 웬 이상한 생물학과 학생이 고양이 지도를 찾는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Feline neuroanatomy(고양이과 신경해부학)에 대해 물었어야 한다. 그 정도로 세분화된 책이 없다면 veterinary anatomy(수의해부학)에 대해 물었어야 하고.][* 책 정보를 왜 굳이 사서한테 물어보는지 의문이 드는 사람이 있을 텐데, 저 당시에는 도서검색용 컴퓨터는 커녕 [[애니악]]조차 나오기 한참 전이다.] 파 락어웨이 [[고등학교]]를 1935년에 졸업하고 그 해에 [[MIT]]에 입학하여 1939년에 졸업하였다.[* 본래 전공은 [[수학]]이었다. 그러나 수학이 너무 추상적이라면서 [[전기공학]]으로 전공을 바꾸었는데, 너무 나갔다고 생각하여 최종적으로 [[물리학]]으로 전공을 바꾸었다. 물리학은 지나치게 추상적인 수학과 지나치게 실용적인 전기공학의 사이에 있어서 마음에 들었다고 한다.] 그 뒤,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물리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을 때 그의 나이는 24세였다.[* 원래는 대학원도 MIT에서 다니려 했으나 슬레이터 교수의 조언으로 타 대학원을 가기로 했고, 그래서 정한 곳이 프린스턴이었다고 한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미국의 [[원자폭탄]] 계획인 [[맨해튼 프로젝트]]의 일원으로 일하였으며 이후 [[코넬 대학교]] 이론물리학 조교수로 재직하였고, 1950년쯤부터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캘텍]]의 교수가 되어 계속 재직하였다. 기존의 틀을 깨는 타입인데, 강연을 해주는 조건이 "싸인을 13번만 하겠다."[* "각종 서류를 읽고 도장찍는 게 귀찮다."라는 말이다. [[팬]] 싸인회가 아니다. 그리고 열세 번째 싸인은 수표에 싸인해야 한다. 결과적으로는 "진짜로 내가 강연을 했음."이라는 서류에 13번째로 싸인해야 해서 파인만은 "싸인 안하고 돈도 안 받겠음!"이라고 선언해버렸다. 알다시피 정부든 학교든 이미 책정된 예산을 지급하지 않으면 그것대로 문제라... "교수님 돈 안 드리면 안 된답니다." → "그럼 그냥 주시면 되죠." → "서명하셔야 하는데요." → "안 합니다!"라는 실랑이가 오갔다고. 결국 어찌저찌해서 열세 번째 서명은 현금 찾을 때 [[수표]]에 했다고 한다.]라고 말하거나, [[노벨상]] 수상자리에서 왕에게 뒷면을 보이면 안 된다는 관례에 "그러면 뒤로 깡충깡충 뛰면서 입장해야지!"라고 결심하거나[* 그런데 사실은 뒷면을 보여도 상관 없었다고 한다. 그때 바뀌었다고 한다.], [[로스 앨러모스]]에서는 편지 [[검열]] 제도에 도전하는 등[* 자서전 "남이야 뭐라 하건!"을 읽어 보면 관련 에피소드를 읽을 수 있다. 편지를 죄다 암호로 만들어버려서 검열관들이 도대체 무슨 소린지 못 알아먹게 만드는 것이었는데, 이 장난을 칠 땐 자기 아내와 합작했다고 한다. 어쩔 땐 아내가 더 적극적이었던 정황도 있다. 이 아내가 그의 첫 아내인 알린이다.] 이런 탈권위적인 태도를 평생 보여주었다. 천재들이 모인다는 [[멘사]]도 매우 싫어해서 자신의 [[IQ]] 검사 결과가 125로 나왔을 때[* 다만 파인만이 받은 지능검사는 현재의 [[웩슬러 지능검사]]의 언어성 지능 부분을 중점으로 하는 검사였으므로 파인만의 수학적 능력을 완전하게 보여주지는 못한다. 아마 그 당시 파인만이 현재의 웩슬러 지능검사를 받았다면 동작성 지능이 높게 나왔을것 같다.] 멘사의 가입 권유를 자연스럽게 거절할 수 있어서 매우 만족했다고 한다. 반면, 학생들이나 물리학에 관심있는 사람들에게는 대단히 관대했던 듯하다. 상당히 겸손하다.[* 다만, 자서전에서는 자신의 일화에 대한 생각을 알려줘서 겸손함을 느낄 수 있지만, 그가 [[암산]] 대결을 해서 이길 때, 사실은 그런 숫자 미리 알고 있어서 (알고 있더라도 암산을 더 유추했어야 했기 때문에 일반인들에게 복잡한 암산이긴 했다.) 이겼다고 자서전에서는 이야기 하는데, 대결한 사람들은 그런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겸손함을 못느꼈을 수도 있다.] 노력과 실력에 대해 말하면서도 자신은 운이 좋았다고 한다. [[운]]에 대한 생각이 깊은데 보통 로또같은 그런 행운들을 말하고, 좀 더 깊게 생각하는 사람은 노력하는 것도 운이라고 보는데, 리처드 파인만은 [[흥미]] 갖는 것 자체도 운의 일종으로 보았다.[* 학교를 가지 않아서 대수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었어 이 부분도 운이 좋았다고 한다.] 아마 과학계에서 인간의 존재는 '''단지 [[우연]]한 존재'''라는 의견에 동감한 것으로 보인다. 자신이 물리학자가 된 것은 '''어쩌다가 과학에 흥미 생겨서'''라고 말한다. 그리고 남다른 재능으로 [[아인슈타인]]같은 거물에게 세미나할 때 보통 사람처럼 손이 덜덜 떨렸지만[* 손이 떨리는게 선명하게 기억난다고 할 정도.] 물리에 집중하다 보니까 자기도 모르게 세미나를 무사히 끝낼 수 있었는데, 이런 [[집중력]]도 행운의 일종으로 보았다. 그런 집중력이 삶에서 여러번 있었는데 자신이 정말 행운아라고 하였다. 또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하고 맞는 것을 맞다."고 말하는 것을 행운아였기에 누릴 수 있는 행복이었다고 하였다.[* 아버지에게 모든 걸 배웠다고 말했으니 좀 이상한 표현이 될 수도 있지만 그런 환경과 교육까지도 운의 영역으로 보고 있는 듯하다.] 또 권위는 별거 아니라는 태도를 평생 가졌다. 이것은 아버지의 직업인 [[제복]] 세일즈맨에서 유래한다. [[대통령]]이나 [[교황]]도 결국엔 옷 입은 사람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의 아버지 왈, "교황이 평신도와 다른 것은 [[교황관|그가 쓰고 있는 모자]]뿐이란다." 또한 대학원 시절이나 로스 알라모스 시절 물리학계의 거장들과 "권위 따위는 모르겠고"라는 태도로 치고받고 싸우거나, 맨해튼 프로젝트 시절의 로스 앨러모스에서도 비밀을 유지하려는 정부나 군에 맞서 노동자나 계산원에게까지 이것이 어떤 프로젝트인지 알려서 근로의욕을 고취시킨 일화가 좋은 예다.[* Richard P. Feynman,《발견하는 즐거움》, 승영조 옮김, 승산, 2001] 파인만의 업적은 물리학 분야에서 지대한 족적을 남겼고, 파인만이 남긴 학술적 유산들은 현재에도 활발히 연구되고 있으나 정작 그가 아인슈타인 이후 대중에게 가장 유명한 물리학자 중 한 명이 된 것은 그의 유머러스한 성격 덕이 컸다. 사실 파인만의 연구 분야나 주요 업적들은 대중들이 이해할 만한 게, 설명할 만한 게 아니다. 애초에 자신의 연구를 대중에게 설명한다는 것 자체에 파인만 스스로도 부정적이었다.[* 디랙과 나눴던 대화가 있는데 한 잡지에서 디랙을 취재하고 싶었는데 파인만과 디랙을 헷갈려 파인만에게 연락을 취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들은 디랙은 "대중에게 알려지는 것은 [[매춘]]"이라며 경기를 일으켰고, 파인만은 나중에 자신도 그의 말이 맞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한 적 있다.][* 4일간 일반인 대상으로 진행했던 양자 전기역학 강의에서 이해 못 하는 것을 배경으로 깔고 시작한다. 그저 이런 것이 있다더라 정도만 알아가면 성공한 것이라고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